검암동으로 이사온 후로 나는 이른 아침과 저녁에 산책을 하면서 검암상동의 풍경을 담는 일로 즐거움을 삼았다. 특별히 이곳 저곳을 돌아보다보다 꽃뫼마을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개발지역에서 제외되어 원주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생활터전으로 남겨진 모양이었다. 내게는 꽃뫼마을이 마치 보물창고와도 같이 느껴졌다. 드넓은 들판은 아니지만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고향같은 마을이었다.
▲ 농사준비로 논두렁을 불태우는 농부 모습
▲ 미나리를 캐러 나온 여인네들과 승마를 즐기는 모습
봄이되어 들판에 나가면 농부들이 농사짓기 준비 중 하나로 논두렁 불태우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농사짓기위한 준비요 병충해예방차원으로 하는 작업이리라 생각된다. 지금은 논두렁 불태우기는 금지된 작업이다. 잘못하면 산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미나리밭에서는 봄미나리 뜯는 풍경도 어릴적 보아오던 시골풍경이라서 정겹게 느껴지곤 했다.
꽃뫼마을에는 특별히 승마장이 있다.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과 장애, 심리 치료를 위해 승마를 하는 자녀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도심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기에 신기했다. 수시로 논둑으로 나와서 모가 자리를 잡았는지 병충해에 걸리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을 느낄수 있었다.
가을들판에 나서면 벼가 익어가는 내음이 정말 구수하게 느껴지며 마치 내가 농부라도 되는양 흐뭇한 마음이 들곤 했다.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벼논 풍경은 한 폭의 그림같았다.
때로는 일부러라도 들판에 나가 걸어봤다. 메뚜기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벼 낱알들이 토실하게 여물어가는 풍경을 보노라면 어머님의 농부생활이 떠올라서였을까? 아침이슬 맞으면서 논두렁 밭두렁을 살피느라 그리 고된 인생을 사셨음에도 어린 자식들은 엄마의 삶을 헤아리지 못하는 철부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한번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늦은 가을 트렉터가 추수를 시작한다. 이제의 농부들과 예전의 농부들은 많은 차이가 있다. 예전처럼 동네사람들이 품앗이 작업으로 벼를 베고 묶어세우고 탈곡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기계가 다 해주니 고생이 줄어들었다.
추수작업이 끝났으니 김장준비로 분주해진다. 이곳 꽃뫼마을에는 가을이 되면 가족 친지들을 불러 김장거리를 준비하고 나누는 작업이 정스럽고 아름답던 풍경이다.
한겨울이 왔다. 눈이 온 기찻길 옆길을 동네 이웃들이 산택을 나서는 모습이 눈에 띈다. 동화같은 풍경이고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행복해지는 모습들이다.
기찻길옆 어귀 감나무에 달린 감은 수확하지 않고 새들의 겨울먹이로 남겨둔다. 이런 풍경을 보노라면 농부들의 진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농사를 다지어 겨울양식을 준비하지만 새들이야 어디 먹이를 준비하겠는가 그런 새들을 위한 배려이리라.
검암중학교 교정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함성을 지른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젊어진다. 아이들의 풋풋한 모습들은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그래 마음놓고 뛰어놀고 소리지르렴 그것도 한때거든” 아이들에게 그리 말해주고 싶다.
검암으로 이사오기 전, 지인들에게 권유하기도 했다.
“검암동이 발전된다네 전철도 들어오고 아라뱃길도 생기고 인천 지하철 2호선도 들어선대 우리 검암동으로 이사갑시다”
지인들은 이렇게 나를 핀잔주었다.
“내 손에 장을 지져라”
“개건너 검암동에 무슨 역이 생기고 발전한다고?”
그들이 이제는 후회한다.
“그때 자네말을 들을걸...”
지금도 꽃뫼마을은 농부들의 손길과 발길이 부지런히 오가고 농작물들은 농부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검암역은 이전보다 훨씬 분주해지고 많은 서구민들이 서울로 시내로 드나드는 관문역할을 톡톡히 해대고 있다. 검암역앞 하동에 8천세대에 이르는 주택단지가 들어선다니 이제 검암동은 서구의 주요지역중 하나가 될 것이지만 꽃뫼마을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이길 기대해본다.
※ 사진출처 : 직접촬영